언어로서의 권력지배권력은 언어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영어 강사인 백선생과 그의 하수인인 전도사는 언어를 통해 지배 이데올로기를 전파한다(라깡식으로 말하면 언어적 그물망인 상징계가 금자가 대면해야 하는 장소이다)
금자와 그녀의 딸 제니의 상봉 모습을 보자. 금자가 감옥에서 복역하는 동안 호주로 입양된 제니는 모국어인 한국어를 하지 못한다.
그녀가 할 수 있는 말은 영어 강사인 백선생이 사용하는 말인 영어다.
그러기에 백선생이 금자와 제니의 말을 통역하는 장면은 마냥 우습지만은 않다.
모녀 관계인 그녀들을 이어주는 것은 모국어(mother tongue, 직역하면 엄마의 혀, 엄마의 언어)가 아니라 백선생의 혓바닥에서 미끌어져 나오는 언어인 것이다.
이 관계는 어떻게 역전되는가?
집단 복수 뒤에 남은 것박찬욱 감독은 <친절한 금자씨>가 개봉되기 전 한 인터뷰에서 영화가 2/3 가량 전개된 지점에서 이 영화는 급선회하는데 그 장면을 관객이 어떻게 수용하느냐에 따라서 영화의 평가가 달라질 것이라고 했다.
이 영화에서 2/3 지점은 금자가 백선생을 폐교에 잡아다 놓고 그가 유괴했던 아이들의 부모를 불러 처형하게 하는 장면이다. 즉 금자는 이 장면에서 복수의 주체가 되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복수를 미룸으로써 복수를 관찰하는 인물로 전환한다.

먼저 이 장면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폐교라는 공간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학교는 감옥, 공장, 병원과 마찬가지로 규율 권력이 작용하는 곳이다. 이 곳에서 그 권력의 행사자인 백선생을 잡아놓고 처형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학생들은 (죽고) 없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한 명은 살아있다. 금자가 백선생을 처음 만났을 때는 학생일 때다. 학생과 교생 선생으로 둘이 처음 만난 것. 그렇다면 금자는 학생 대표로 이 자리에 서게 된다. 이제 학생과 학부모가 권력의 주체였던 교사를 처형한다.
재미난 것은 그들이 처벌 계획을 세울 때 그들의 말이 스피커를 통해서 다른 방에 있는 백선생의 귀에 들린다는 것이다. 스피커는 학교, 공장, 병원, 감옥에서 감시와 규율의 장치로 사용되는 언어 권력이다. 그런데 이제 그 언어 권력이 역전된 것이다.
하지만 피해 아이들의 부모들은 백선생의 복수에 망설인다. 왜 그들은 망설이는가? 그 망설임에는 사회경제적 토대의 변화와 관련이 있다.
전통적인 농업사회에서는 사회의 전반적 생산 관계가 동질적이었다. 어디를 가든지 땅만 있으면 먹고 사는 데 크게 지장이 없었다. 복수를 감행하고 다른 곳으로 떠나도 생업구조는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현대 산업사회는 개인이 선택한 기능과 자격으로 생업을 영위할 수 있는 사회 경제적 범위는 좁다. 또 어떤 직업을 선택했을 경우 그것이 고소득을 보장하면 할수록 다른 직업으로 이동하기 힘들다. 대부분의 임금노동자들은 종신 고용 체제 속에서 안주하기를 원한다. 이러한 생업 구조하에서는 누구나 원한을 풀기 위해 자기 경제적 터전을 파괴하는데 주저한다. 그들은 자유로운 개인이 아니다. 이미 현대 사회구조에 순화된 개인일 뿐이다.
어려운 합의하에 모두들 침묵을 맹세하면서 복수의 처형은 이루어진다. 마지막으로 백선생의 시체를 흙으로 덮으려는 순간, 금자는 두 방의 총알을 쏜다. 그리고 그녀는 총을 백선생의 시체와 함께 묻어 버린다. 그녀에게 백선생과 대결을 위해 임시방편으로 필요했던 남근을 포기하는 것이다.
복수에 가담했던 자들은 다시는 부활하지 말 것을 바라는 것처럼 무덤 밝기한다. 이같은 의식을 치룬뒤 그들은 금자의 직장인 빵가게에 모인다. 그때 부모 중 한 사람이 묻는다. “돈은 계좌로 보내주나요?”
모든 것을 금전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현대 자본주의의 속성. 구원과 복수를 향한 금자의 노력도 자본주의 상품가치로 전락하는 순간이다.
이 장면까지가 아가사 크리스티의 집단 복수극 <오리엔트 특급살인>을 연상하게 한다면, 이후의 장면은 알베르 까뮈의 <정의의 사람들>이라는 희곡을 연상케 한다.
러시아 짜르(황제)의 숙부라는 절대 권력을 암살하려는 테러리스트들의 이야기인 이 희곡은 역사적 정당성에 대한 개인의 윤리 문제를 다루고 있는 작품이다. 암살의 성공 후 주인공 칼리아예프는 스스로 체포되어 사형대의 이슬로 살아진다. 살인이라는 또 다른 악행이 선으로 추앙 받을 수 없도록 할려고.
복수의 과정을 객관적으로 지켜봤던 금자는 칼리아예프와 같은 양심의 가책을 받는다. 그녀는 속죄를 통해 구원받을 수 있을까?
금자는 원모 소년의 혼령과 만난다(그건 한편으로 자신의 양심과 대면하는 순간이다) 금자가 속죄의 말을 꺼낼려는 순간 원모는 금자의 입에 재갈을 물린다.
입막음은 변명을 할 수 없음이다. 이미 저질러진 죄에는 변명이 있을 수 없다. 그러고 보면 박찬욱 감독의 복수 3부작에는 입막음이 모두 등장한다. 동진은 류를 처형하면서 류에게 말을 건네지만 류는 처음부터 말을 할 수 없는 입 막힌 존재(벙어리)이다. <올드보이>에서 오대수는 이우진에게 변명을 하며 자기 스스로 입을 막는다.

<친절한 금자씨>에서는 위의 장면 외에도 여러 장면에서 입막음이 등장한다. 금자는 유괴 사건으로 잡혀갈 때 마스크를 하고 있다. 그녀는 자신의 아이를 살리기 위해 진실을 입 다문다. 그 결과 백선생은 잡히지 않고 더 많은 유괴 살인을 저지를 수 있는 빌미를 제공했다.
금자가 백선생을 잡아왔을 때 금자는 백선생의 변명을 듣지 않기 위해서 입을 막는다(사실 그는 속죄할 인물이 아니다)
유괴 사건으로 죽어간 아이들은 이미 입이 막힌 존재들이다.
그리고 영화 맨 마지막에 금자는 자신이 만든 두부 모양의 케이크에 머리를 쳐박고 입을 막는다. 그녀는 그토록 속죄하고 싶어했고(두부의 상징) 구원을 받아 다시 태어나고 싶어했다(케익의 상징). 금자의 마지막 발버둥은 구원을 향한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빵가게 점원 근식이 '누나'라고 부를려고 해도, 제니가 '엄마'라고 부를려고 해도 금자는 '금자씨'로 불리기를 원했다. 유괴 사건으로 붕괴된 가족을 바라보며 자신이 새로운 가족을 가지는 것에 죄책감을 느꼈기 때문이 아닐까?
미래에서 온 목소리우리 사회에서 금자와 백선생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씨네21>의 남동철은 백선생의 모습에서 전두환이라는 속죄하지 못하는 지배 권력을 봤다고 했다. 몇몇 영화 담당 기자들은 마스크를 하고 취재진들 사이에 둘러 쌓인 금자의 모습을 보고 김현희의 모습을 찾아냈다.
이런 장면 외에도 이 영화는 충분히 정치적 메시지로 읽을 만한 것들이 보인다. 예컨대 교도관으로 '통일의 꽃' 임수경이 까메오 출연을 했다는 점, 사제 권총 설계도를 건내 준 <법구경> 할머니가 양심수로 보인다는 점, 케익 가게 장씨(오대수 분)의 타이밍 약 이야기는 개발 독재시대의 근로자들의 처지를 떠오르게 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일대일로 딱 맞아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금자가 복역한 기간은 1991년에서 2004년까지 13년 반의 기간이다. 박찬욱 감독은 암시적으로라도 80년대와 대면하려 했다면 시기를 80년대에 보다 가깝게 맞췃을 것이다(박찬욱의 80년대는 <올드보이>에서 TV장면으로 느닷없이 등장했다가 재빨리 사라질 뿐이다).
여담이지만 임수경의 출연은 애초에 시나리오상에 없던 것으로 임수경이 여자 교도소에 대해 자문을 해줄 수 있다고 출연진 중의 한명인 김부선을 통해 접촉해 오면서 우연찮게 이루어지 것이다.

인터뷰를 보면 박찬욱이 유일하게 인정하는 것은 백선생의 콜렉션인 아이들의 처형 비디오가 '알카에다'를 은유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모든 것들을 굳이 80년대에 대한 은유라고 보기 보다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역사가 우리 사회에 가하는 폭력과 그에 대한 저항, 그리고 이어지는 무력감으로 봐도 좋을 듯 싶다.
영화는 너무나 도덕적으로 살고 싶어했던 이금자. 그녀는 끝내 구원을 받지 못했다고 말하면서 끝을 맺는다. 하지만 이 영화 마지막에 그래도 따뜻한 뭔가가 나타난다. 지금까지 이 영화의 나레이션을 맡았던 목소리(성우 김세원의 목소리)가 제니의 목소리였다는 것(박찬욱은 이 목소리가 50년 후의 제니의 목소리라고 말했다)
제니는 말한다.
“그래도 나는 금자씨를 좋아했다...안녕...금자씨!”
그렇다면 지금껏 객관적 나레이션으로만 들렸던 제니의 목소리는 먼 미래의 제니. 엄마의 언어를 되찾은 제니가 엄마를 애도하며 철저히 주관적인 입장에서 우리에게 들려준 이야기였던 것이 된다. 현대 사회에서 변명이 용납되지 않았던 금자의 속죄는 미래의 제니가 금자의 혀가 됨으로써 속죄의 말을 대신 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사회를 살아가면서 우리가 저지른 죄는 (그것이 아무리 정당하더라도) 용서는 받지 못하겠지만 뭔 훗날 이런 식으로 위로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그것이 폭력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희망일까?
나는 이렇게 <친절한 금자씨>를 봤다.